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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샘터.......о♡/달의생각

제 성적에 가슴을 베었어요

“제 성적에 가슴을 베었어요”

아들은 고1이고, 딸은 중1이다. 딸은 방학하는 날 바로 기차역에 긴 콧바람을 날리며 외할머니댁으로 날아갔고, 아들은 학교에서 하는 방과후 학교 수업 대신 아침 10시부터 오후 두세 시까지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방학하는 날부터 입이 귀에 걸려 득달같이 달려온 우리 집 딸아이를 보는 동생은 착잡한 모양이다. “언니, 아이들 학원 안 보내도 돼? 안 불안해, 이렇게 놀리면?”

내가 성인군자도 아닌데 왜 안 불안하겠는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들을 밤낮으로 학교에서 학원으로, 학원에서 독서실로 드난살이를 시키는 것은 아니지 싶었다. 그래서 방학하기 전에 두 아이에게 물었다. 방학을 어떻게 보내고 싶으냐고. 그랬더니 딸아이는 기말고사 끝이라서 그런지 무조건 놀고 본다고 했다. 그래서 그러라고 했다. 아들은 공부도 좋지만 그림이 그리고 싶다고 했다. 그림도 기본이 있어야 하는데 기본이 없다 보니 그림이 많이 흔들린다고 했다. 그러니 그림을 방학 때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러마 약속했다. 어렵게 아들 고등학교에 찾아가서 방학 때 수업을 못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담임 선생님께서 학생이 나름대로 계획만 있으면 된다면서 학생과 다시 이야기를 해 보겠다고 하셨고, 아이는 학교 수업 대신 미술을 선택해 열심히 하고 있다. 아직은 둘 다 자기들의 선택에 흡족해하는 것 같다.

 

고등학교 들어가서 아이가 성적표를 안 보여줬다. 그래서 성적표가 궁금하다고 했더니 아이가 그랬다. (아이의 말을 더도 덜도 아닌 그대로 표현하면)

“어머니, 제가 제 성적에 가슴을 베였어요. 저한테 너무 실망했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저보다 더 마음이 상할까 봐 못 보여드리겠어요. 다음에 잘해서 보여 드릴게요. 한번 믿어보세요. 기말고사 때는 만족할 만한 성적 보여 드릴게요.”

그래서 난 이렇게 물러났다.

 

“아들아, 엄마 보여 주려고 공부하진 말아라. 그냥, 궁금했을 뿐이야. 어차피 성적은 네 것이야. 행여나 엄마 보기 좋으라고 좋은 성적 받을 생각은 말아라. 좋든 나쁘든 그 결과에 네가 만족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하지, 엄마 같은 제3자는 사실 별로 중요한 게 아니야. 어차피 인생은 네 것이거든.”

아이는 진짜 열심히 공부를 했다. 새벽 두세 시가 되어야 잠자리에 들었고, 내가 애처로워서 자라고 사정을 하면 “안 돼요. 공부해야 돼요!” 그랬다. 그래서 보다 못한 나는 아이에게 편지를 썼다. “아들아, 너무 애쓰지 말자. 어쩌면 너무 애써서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애쓰면서 살지 말자.” 아이는 그날 저녁에 나한테 묵직한 펀치를 한 방 날렸다. “어머니가 다른 어머니들처럼 공부하라고 조금만 잔소리를 해 주셨더라면 제가 지금 이렇게 힘들게 공부 안 해도 되는데”라고 콧소리를 섞어서.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공부만 하라고 자신있게 말 못하는 이유가 있다. 선생인 주제에. 지금 아이들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코 박고 하는 공부가 그 아이들의 미래를 장밋빛으로 보장해 준다는 것. 확신할 수가 없다. 더 확신할 수 없는 것은 누구나 열심히만 하면 원하는 만큼의 성적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솔직해지자면 내 생각에는 공부는 재능이다. 공부에 재능이 없는 학생이 똑같은 책과 똑같은 방식으로 타고난 재능을 가진 학생과 똑같은 시간에 경쟁을 해서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아마도 한번쯤 입시경쟁을 치러본 사람이라면 이 불편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뼈저리게 경험해 봤을 것이다.

참 가슴 아픈 일은,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다시 아이들을 자신들이 뼈저리게 아팠던, 그래서 뒤도 돌아보기 싫은 그 줄에 다시 세우고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몰아세운다는 것이다. 너나없이.

 

저자 이미숙/울산시 남구 옥동

출처 http://www.hani.co.kr/arti/opinion/readercolumn/33193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