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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샘터........о♡/좋은글·시와음악

[스크랩] 비파와 칠현금으로 노래하라

 

                          비파와 칠현금으로 노래하라              by Hannah

 

 

사람들은 새해를 맞이 하느라 부산스럽습니다.

어쩐지 발걸음이 더욱 빨라지는 것 같고 얼굴은 새로운 결의에 상기되고

새로운 소망으로 눈빛을 반짝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은 자기들의 사랑이 더욱 공고하기를 바라며 손가락을 걸고

책상 앞에 앉은 학생은 새해에는 더욱 열심히 공부하리라 머리를 질끈 동여 맬지도 모릅니다.

새해 벽두 마다  되풀이 되는 금주, 금연 따위의 자신없는 다짐도 합니다.

한 해를 마감하며 밀려오던 후회를 다시 되풀이 하지 않으려고

사람들은 새해를 맞이 하면서 자꾸만 그렇게 자신을 다잡아 봅니다.

그런데 재작년, 작년의 정초에 다짐하던 것들을 해마다 되풀이 하는 걸로 보아

다짐했던 것들이 꼭 마음 먹은대로 따라주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사람 마다 가슴 속에  자기만의 음색을 가진 악기 하나씩을  품고 삽니다.

그래서 그 영혼이 울릴 때 마다 자기만의 떨림과 음색으로 소리를 냅니다.

줄(絃)을 활로 긋거나 손으로 뜯거나 튕길 때 줄은 바르릉 떨면서

울림통인 몸체에 공명을 만듭니다.

가뭇없는 감정의 변화에 따라 우리 영혼은 조바꿈(모듈레이션)을 수시로 해 가면서

마음의 거문고(心琴) 줄을 울려 다양한 소리를 내게 됩니다.

그것은 영혼이  뒤척이는 소리일 수도 있고 기대감에 두근거리는 소리이거나

한숨을 토해내는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새가 우리의 머리 위를 지나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다.

그러나 새가 우리 머리 가운데 집을 짓는 것을 막을 수는 있다.

나쁜 생각이란, 마치 우리 머리 위를 스치는 새와 같아서 막아낼 도리는 없다.

그러나 그 나쁜 생각이 우리의 머리 가운데 자리를 잡고 들어 앉지 못하게 물리칠 힘은 우리에게 있다.> 

마틴 루터의 말입니다. 

우리의 갈등은 육체와 영혼의 머리 위에 수시로 둥우리를 치려하는

갈가마귀와도 같은 죄성의 유혹에서 비롯합니다.

육체와 영혼.

 영혼을 둘러싸고 있는 육체와,

육체를 지배하며 움직이게 하는 영혼으로 이루어진 나. 

육체와 영혼은 따로 구분지어 생각할 수 없는 하나입니다.

그러면서도 육체는 영혼이 이끄는대로 따르려 하지 않고

영혼이 육체의 빗나감을 용납할 수 없음에 인간의 고뇌는 시작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바울의 탄식이 곧 내 영혼의 탄식입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바울의 연약함은 바로 내 육신의 연약함입니다.

 

정사(正邪)와 선악(善惡). 

이것을 판단하는 것은 영혼이며 행하는 것은 육체입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에 의해 선행을 이룩하고 온전해진다고 믿는 바리새的1 사고의 어리석음과

 내 속에 있는 것들이야 말로 무가치한 것임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고집스러움으로 인하여 

행위로 완전에 이르는 줄 알고 자꾸만 자꾸만 누추한 겹옷을 덧입습니다.

 그러나 누더기를 아무리 껴입는다 한들 모양새가 좋아질 수 없습니다.

 시급한 것은 내 속의 것들을 시인하고 토해내는 일입니다.

 탈각(脫殼). 그렇습니다. 내가 뒤집어 쓰고 있던 단단하고 질긴 허울을 벗어내는 일이 시급합니다.

 

나의 부끄러움을, 누추함을 우선은 드러내야 합니다.

 셀 수 조차 없게 많은 욕망들.

내가 이룩했다고 자위하던 내게 속한 것들이 사실은 지극히 감상적이고

 원초적인 허상의 것들이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진실이 결여된 허구적인 감상은 극히 순간적이며 결국은 증발되고 마는 것임을.

 도처에서 진실인 것 처럼, 참인 것 처럼, 최선인 것처럼 포장된 가식과 허위가

 혼돈과 미망으로 어지럽게 할지라도

 교묘히 금박으로 도금한 싸구려 상품이 진품의 무게를 따라 잡을 수 없는 함량미달임을.

 선을 가장한 위선이 참사랑의 밀도를 흉내낼 수 없는 멀건 것임을.

 

 

그렇습니다.

 거짓은 반드시 드러났다가 뺑소니치기 마련이며

 진리는 잠잠할 지라도 영원히 드러나 있기 마련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고 위안이 있습니다.

 육적인 것.  육체의 소욕은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본질이 어두움에 속한 까닭입니다.

 그렇기에 육체의 소욕은 아무래도 은밀하게 감추려 하고 어두운 곳에 숨으려 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스스로 향내를 풍길 수 없습니다.

 그 까닭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있는 것이며 부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소욕이란 아무리 치장을 하고 도금을 하고 향을 피워도

 회칠한 무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영혼의 아우성을 누르고 육체의 소욕이 승해지면 자연히 육적 중심의 인간이 됩니다.

 영혼의 찔리움이나 탄원은 기가 꺽이고 '죄성'에 대해 불감증 환자가 되고 맙니다.

 환자라 함은 말 그대로 병을 앓는 사람입니다.

 환자는 병을 이겨야만 고통에서 해방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중증의 환자임을, 사형선고를 받은 불치병 환자임을 깨닫지 못 함에

 우리의 슬픔이 있습니다.

 우리의 불완전성은 우리 힘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약점입니다.

 우리의 채워지지 않는 빈 자리를 노리는 것이야말로 육적인 것들의 도전입니다.

 그 도전에 대항하기 위해 갖춘 우리의 방패는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휘청거리는 양심. 호롱불처럼 희미한 지혜. 꺾이기 쉬운 의지.

꼬리를 사릴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용기.

 어느 것 하나 자신이 없습니다. 이런 나의 불완전성이 나를 절망케 합니다.

 

 

 

그러나 나를 절망 가운데 그냥 두지 않고 일으켜 세우는 세미한 음성이 있습니다.

 내 영혼의 깊은데서 끊임없이 울려 나오는 그 음성에 귀 기울이고 무릎을 끓을 때

 내 육적인 소욕이 비로소 사라지고 굴레에서 벗어난 자유인이 됩니다.

 거울을 들여다 보고 얼굴의 더러움을 알듯이, 진리에 나를 비추면서 나의 됨됨이를 바로 알고

 비로소 진리 앞에 겸손의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만든 공백이 있는데 이 공백은

예수 그리스도가 채워지기 전에는  

아무 것으로도 메꿀 수가 없다> 라고 파스칼은 "팡세"에서 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빈 자리가 그리스도로 채워질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 집니다.

 비로소 충만해 집니다. 비로소 온전해 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약한 것을 강하게 하시며,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하시며, 추한 것을 성결케 하시며,

 부족한 것을 온전케 하시며,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분. 또한 있는 것을 영원케 하시는 분.

 천지를 정연케 하는 축. 어둠을 꿰뚫는 참빛. 결코 구부러짐이 없는 참 진리.

 어느 것 하나 두려워 함 없게 해 주는 담대한 믿음.

 이 힘이 나를 용맹스럽게 합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나를 도와 이기게 합니다.

 비로소 나의 육체는 자랑스럽게 되고 나의 영혼은 고귀해 집니다.

 신을 닮은 영혼과 육체가 하모니를 이루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나의 온 몸과 영혼으로 부르는 노래는 비파와 칠현금으로 울리는 찬양입니다.

 영혼의 줄을 튕켜 온 몸을 울리며 소리내는 내 영혼의 노래입니다.

 

 

 


 

 

  1. 기원전 2세기에 일어난 유대 민족의 한 종파. 율법의 준수와 종교적인 순수함을 강조하였으나 실제로는 율법의 세목(細目)까지도 철저히 지킨다는 형식적인 순수함을 근거로 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을 우월적(優越的)으로 분리시켜 특수층으로 자처하며 형식과 위선에 얽매인 종파. [본문으로]
출처 : 한나의 뜨락
글쓴이 : 한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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