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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샘터........о♡/좋은글·시와음악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콩쿠르 우승 테너 최승원

“매혹적인 황금의 목소리로 청중을 전율케 했다” - 뉴욕타임즈.

“카루소를 연상케 하는 탁월한 음성의 소유자” - LA매거진.

“연주가 끝난 뒤에도 내 심장에 깊이 남는 여운은 행복이었다” - 대처 전(前) 영국 수상.

“파바로티, 도밍고, 카레라스 다음 세대를 이어갈 뛰어난 음악가” - 헨리키신저 전(前) 미 국무장관.

세계 유수 일간지와 저명인사들이 그를 두고 한 말이다. 성악가들이 꿈꾸는 최고의 무대. 미국 메트로폴리탄오페라 콩쿠르에서 지난 93년 동양인 남자 최초로 우승한 그는 바로 본교 최승원(성악 88년 졸) 동문이다. 장애와 편견을 딛고 세계무대에 우뚝 섰고, 사랑의 실천을 몸소 보여주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최 동문을 만났다.

순탄치 않은 어린 시절, 소아마비 이겨내고 음악 시작하다.

그의 어린 시절은 순탄치 않았다.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 동네에서 소문난 말썽꾸러기였다. 그런데 네 살 무렵, 불행히도 소아마비가 그를 엄습했다. 당시 백신이 부족한 열악한 환경 때문에 질병을 피하기 어려웠고, 치료를 위해 백가지 노력을 했지만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말썽꾸러기였던 그는 그렇게 깊은 절망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다. 학창시절도 암울했고, 대학 진학도 별로 고려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 그가 신학대학을 거쳐 본교에 진학하게 된 것은 스스로를 이겨내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신앙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소아마비에 걸렸어요. 왜 내가 아파야하는지 끊임없이 물었습니다. 왜 하필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여야만 할까? 내가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기에 내가 이렇게 고통을 겪어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반발심도 컸습니다. 학창시절 내내 내면에 갇혀 어두운 생활을 했습니다. 대학을 가야겠다는 생각도 별로 안했어요. 그러다 문득 극복해내고 싶다는 의지가 발동했어요. 처음에는 서울소재 모 대학교 공과대학에 지원했죠. 다 붙었는데 신체검사에서 떨어졌어요. 반발심이 생겼지만 이겨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다시 도전했고 총신대에서 신학생으로 생활하게 됐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힘든 시기를 거친 최 동문을 지탱해주는 힘은 신앙이었다. 신앙은 그에게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줬고, 신학대에 진학해 신학을 깊게 공부할 생각이었다. 평소 꾸준히 노래를 즐겨 불렀던 최 동문은 신학대를 다니다 성악을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본교 성악과에 84학번으로 입학했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 출발이 약간 늦은 셈이다. 음대 진학에 대해서 집안의 반대가 거셌다. 학비도 많이 들고, 장애를 가진 사람이 무대를 서면 편견어린 시선을 받아 아들이 상처받을 것에 대해 부모님의 우려가 컸기 때문.

“신학대학을 다니면서 정말 하고 싶은 게 뭘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장애인을 덜 힘들게 하기 위해서 성악과에 지원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왜냐면 내가 불편한 것은 몸이지 마음이나 목소리가 아니기 때문이었죠. 집에서는 반대가 심했어요. ‘뭣 하러 음대를 가느냐’, ‘학비는 어떻게 마련 할 거냐’는 걱정에서부터 ‘네가 무대에 서면 사람들이 편견을 가지고 쳐다 볼 것이고 상처받지 않겠느냐’고 우려를 많이 하셨죠. 그걸 이겨내고 싶었어요. 일부러 더 열심히 다녔습니다. 난간을 잡고 88계단을 힘들게 올랐고, 1학년 1학기 때는 과에서 수석을 해서 장학금도 탔어요.”(웃음)

힘들게 떠난 미국 유학, 참 스승을 만나다.

힘들게 학교를 다녔고, 학과 수석을 할 정도로 재능을 보였던 그는 성악에 대한 열의에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고 적당한 배움터를 물색한다. 소리의 원조이자 루치아노 파바로티 등 유명한 성악가를 많이 배출한 이탈리아가 성악 공부에는 제격이었지만 비싼 학비와 이질적인 문화, 언어 등의 문제로 이탈리아 대신 미국 유학을 떠났다. 미국은 무엇보다 장애인 복지시설이나 우호적인 사회적 환경이 잘 갖춰졌기 때문에 유학을 결심하게 됐다고 한다. 지난 89년 LA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한 최 동문은 그 곳에서 지금의 그를 만든 참 스승을 만나게 됐다.

“대학원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배우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봤어요. 그래서 LA에서 유명하다는 음악 선생님 명단을 1위부터 10위까지 만들어 찾아다녔죠. (웃음) 두 번째 만났던 분이 내 명단 9위에 있던 선생님이었어요. 처음 찾아갔을 때는 동정어린 시선으로 ‘네가 음악을 하려고?’ 하는 눈빛이었죠. ‘노래를 배우고 싶다. 한 번 들어 달라’고 했고, 음악을 듣고 나더니 표정이 확 바뀌는 거예요. 그리고선 며칠 뒤에 저를 다시 불렀어요. 그 사이 비버리힐즈에서 돈 많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초정했던 거였죠. 그 사람들도 제 음악을 듣더니 동양 청년이 노래 정말 잘한다고 좋아했어요. 이후 그 선생님이 교수로 있는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음악대학원에 수업료, 레슨비 면제에 장학금 받는 조건으로 대학원 입학을 허가해 줬습니다. 게다가 UCLA에서 물리치료를 받을 수 있게끔 재활치료까지 도와줬어요. 참 뿌듯하고 행복했었죠.”

수업료, 레슨비 면제에 생활비 일부와 재활치료 지원이라는 환상의 조건으로 대학원 생활을 시작한 그에게 뜻하지 않은 위기가 찾아왔다. 마지막 학기인 4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새로 부임한 음악대학원 학장이 자신의 제자로 들어올 것을 권한 것. 최 동문이 참 스승이라 생각하는 교수를 ‘한물간 사람’이라 평가한 사람 밑에서 공부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는 단호히 거절했고, 한 학기를 남기고 학교를 떠나 뉴욕으로 건너갔다. 위기처럼 보였던 그 사건은 최 동문이 뉴욕 맨해튼음악대학 대학원에 전액장학금과 매달 생활비 600달러를 받게 되면서 기회로 바뀐다. 말 그대로 ‘전화위복’인 셈.

“대학원 생활 다시 하려니까 힘들었어요. 공부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다녔습니다. 미국 상류층은 파티를 많이 해요. 각종 파티에 참석해 노래를 불렀는데 주로 지도교수 소개로 참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그렇게 파티를 다니면서 마이클잭슨, 톰 크루즈, 조지 클루니, 줄리아로버츠 같이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만났어요. 한 번은 어떤 행사에 참여해 노래를 불렀는데 아르바이트로 온 성악가들이 많은 거예요. 행사가 끝나고 이상하게 등수를 부르면서 돈을 주는 거예요. 그것도 봉투에 넣어서. 참 이상하다 생각했죠. 원래 지갑에서 현금 꺼내서 손으로 센 다음에 주거든요. 그러려니 했는데 그게 파티가 아니라 콩쿠르였던 겁니다. (웃음) 교수님이 저를 긴장하지 않게 하려고 파티라고 속였던 거였어요. 그때 제가 마지막에 불려나가 1등 아르바이트 봉투를 받았는데 그 대회가 파사데나 인터내셔널 콩쿠르였습니다.”

“투자한 만큼 자신에게 돌아온다”

콩쿠르를 파티라고 착각했던 최 동문. 긴장하지 않았던 것이 도움이 됐을까. 그렇게 국제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지난 93년 미국 메트로폴리탄오페라 콩쿠르를 우승하면서 정상에 우뚝 섰다. 성악가라면 누구나 우승을 꿈꾸는 최고의 대회다. 기회는 아주 우연히 찾아왔다. 지도교수는 아직 대회에 나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출전을 말렸으나 최 동문은 원서 쓰는 연습이나 해보려고 원서를 받아 작성해 본 것. 책상에 둔 그 원서를 최 동문의 아버지가 부쳐야 하는 우편물로 착각하고 결국 보내버렸다. 물론 그는 이 사실을 까맣고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집에 찾아왔어요. 대회 예선 원서가 접수됐다며 참가해야한다는 거였죠. 지역 예선에 참가해 지정곡, 심사위원 선정 1곡, 자신 있는 곡 이렇게 3곡을 불렀는데 운이 좋았는지 심사위원이 뽑은 노래도 평소 연습하던 거였어요. 그렇게 예선을 통과해 LA지역에서 5명 안에 들어 다시 서부지역 대표선발 대회에 나갔어요. 제가 속한 캘리포니아를 비롯해 유타, 네바다, 애리조나 등 서부 각 주에서 모여든 69명 지역 대표 중에 12명 뽑았습니다. 저도 거기 들었죠. 나머지 11명은 현직 오페라 가수였어요. (웃음) 나중에 이 사실을 안 교수님이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정말 잘했다(You did no more less. It's miracle.)’고 격려했습니다. 그런데 사람 욕심이라는 게 있잖아요. 끝까지 가보고 싶은 거. 뉴욕 맨해튼 본선에 24명이 최종 올라갔어요. 최종 전날 미국에 있는 한양대 성악과 선배들하고 밥을 먹었는데 갑자기 배탈이 났어요. 밤에 고생했었죠. 마음을 비우고 노래를 불렀는데 우승했습니다. 항상 마음 비울 때 잘 되더라고요. 물론 운도 따라줬고요.”

우승 직후, 뉴욕타임즈는 동양인 남자 성악가 가운데 메트로폴리탄오페라 콩쿠르에서 유일하게 우승한 최 동문에게 ‘매혹적인 황금의 목소리로 청중을 전율케 했다’고 평가했다. 이후 그는 헐리웃 영화사 파라마운트로부터 일대기를 만들자는 제의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최 동문은 영화사에서 내건 조건 중에 신념과 어긋나는 것들이 있어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그는 대학원을 마치고 한국과 미국을 넘나들면서 평화와 화합의 음악회를 비롯해 ‘다시 서는 사람들을 위한 음악회’ 등 장애인을 위한 각종 음악회를 개최하면서 사랑의 실천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그런 최 동문에게 후배들을 위한 한 마디를 부탁했다.

“어렸을 때는 ‘내가 왜 아파야 하는지’ 세상에 대한 불만을 잔뜩 가졌어요. 지나고 보니 몸이 불편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환상의 목소리를 가진 것에 대한 자부심이 큽니다. 제가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건 투자한 만큼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겁니다. 개인별로 차이는 있을 수 있어요. 가장 하고 싶은 일, 자신 있는 일에 도전하면서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그만큼 되돌아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야 합니다. 음악은 저에게 새 인생을 가져다 줬어요. 세상은 나에게 음악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저는 했습니다. 아마 신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했어요.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는 거고.”

사회복지법인 음악감독, 음악전문 기자 등 그의 도전은 진행형

신체의 장애보다 더 큰 장애는 장애인을 돕는 것을 편견을 가지고 보는 것이라 말하는 최 동문. 그는 요즘 사회복지법인인 밀알복지재단에서 음악 감독을 맡고 있다. 더불어 시민일보 음악전문 기자도 겸하고 있다. 기회가 있으면 어떤 일이든지 마다하지 않겠다고 강조하는 그의 말은 콘서트에 공연비로 받은 2,700만원을 어린이 암환자를 위해 기부하는 행동에서 더욱 빛난다. 기부를 통해 ‘자존감’을 느낀다고 이야기하는 최 동문은 앞으로 선진국의 복지제도를 참고해 우리나라에도 노인복지와 장애인 복지를 함께 보살필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웃으며 말했다.


글 : 정 현 취재팀장 opentaiji@hanyang.ac.kr
사진 : 권순범 사진기자 pinull@hanyang.ac.kr


학력 및 약력

최 동문은 지난 88년 본교 성악과를 졸업했다. 이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93년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했다. 이어 지난 96년에는 맨해튼음악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주요경력으로는 테너 최승원 초청 독창회(1993)를 비롯해 96년부터 ‘평화와 화합의 음악회’를 열어 왔고, 97년부터는 장애인을 위한 다시 서는 사람들을 위한 음악회를 개최해 큰 호평을 받았다. 최 동문은 또한 세계 오페라 무대에서 각종 상을 휩쓸기도 했다. 지난 88년 동아음악콩쿠르 2위를 시작으로, 미국 유학시절 파사데나 인터내셔널 오페라 우승(1992), 미국 메트로폴리탄오페라 콩쿠르 우승(1993), 오스트리아 비엔나 오페라 콩쿠르 우승(1994)을 거머쥐었다. 그밖에 ‘올해를 빛낸 음악가 대통령 표창(2001)’, 제 17회 여의대상 길 봉사상(2001)을 수상했다. 그는 현재 사회복지법인 밀알복지재단 재단음악 감독을 맡고 있고, 얼마 전부터는 시민일보 문화부 음악전문 기자를 시작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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