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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Are you bored? 권태를 느끼십니까?

권태를 느끼십니까?

 

학교나 직장에 권태를 느끼거나, 결혼 상대자에게, 성(sex)에, TV에도 권태를 느낄 수 있다. Catholic에 정통한 한 분은, “나에게 천국은 갈려고 애쓸 가치가 없는 곳으로 보였다”고 권태를 고백한 것처럼, 교회와 기도에, 심지어 천국 가는 생각에까지도 권태를 느끼는 경우도 있다.

 

권태는 어느 것에도 관심이 부족한 상태로 감정이 의기 소침하고 (따분하고), 느낌과 삶에 활기가 없다. 권태는 단순이 개인적 문제만이 아니고, 문화 전체에 영향을 준다.

 

권태에는 일반적 권태와 사악한 권태가 있다.

 

일반적 권태의 예를 들면 concert에서 음악을 듣다가 잠시 공상에 빠지는 정도의 일반적 권태다. 이는 죄가 아니다. 이유는 잠시 공상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며 또 건강한 증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람은 여가 시간에 지각이 자유롭게 in and out of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권태 전문가들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은연 중에 발생하는 권태는 죄가 아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영혼에 존재하는 하나님 만이 차지하셔야 할 공백을 이 세대의 그 어느 것도 대신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C. S. Lewis도, 이 영감에 의한 권태 즉 이 세상에 우리를 완전히 만족 시킬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다른 세상 즉 천국에서 살 새 삶이 있음을 강력히 암시하는 것이다고 주장한다.

 

사악한 권태란 Buechner목사가 주장하듯,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이간 시키고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는 권태다 이 권태는 의지적 자살이며 죄가 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성스러운 목적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는데(엡4:1) 이에 대적하는 죄인 것이다.

 

Blaise Pascal도, “인간은 너무 불행하여 권태를 일으킬 아무 이유가 없음에도 자연스럽게 권태에 빠지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권태는 타락한 인류의 본성(나-중심적 본성)인 토착병(endemic)일 뿐 아니라, “정사(政事)와 권세(權勢)와 이 어두움의 세상(世上) 주관(主管)자 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엡6:12)이 역사하는 분야다”고 주장한다.

 

권태의 극복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 우리들은 권태를 포함한 모든 질병에서 완전히 치유된다. 그 전까지 성도들은 주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부르신 목적에 우리의 삶을 조정함으로 권태를 치유한다. 다른 많은 만성적인 영적 질환들과 같이 권태도 권태 자체를 직접 치료하려고 해서는 치유가 안 된다. 이 치유에 접근하는 방법은 권태의 반대어들에서 시작한다. 즉 기쁨. 쾌활하게 놀기. 열정(열렬이 사랑함. Passion). 만족 등이다

 

기쁨 (joy)은 성령의 열매(갈5:22-23)이며 성령충만으로 얻는다..

쾌활하게 놀기 (playfulness)는 생산 강박충동으로부터 영감에 의한 자유를 얻음으로 해결한다.

열정(열렬이 사랑함 passion)은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마음 하나로만 살겠다는 의지를 가질 때 성령님이 주시는 권능으로 해결함.

만족 (contentment)은 항상 주 안에서 범사에 감사함을 “배운” (빌4:12) 은혜로 해결함.

 

우리 삶의 왕좌에 앉은 나-중심적 삶을 십자가에 버리고 내 왕좌에 예수님이 앉으시도록 초청하여 예수-중심의 사랑과 passion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 때 성령님으로부터 받는 폭발적인 권능 안에서 권태가 치유된다.

 

즉각적인 치유가 가능한 사람도 있고 시간을 가지고 구원을 이루어감으로 치유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후자인 경우 십자가와 부활을 묵상하면서 인내를 가지고 기도하면서(ask, seek, and knock) 기다리는 믿음이 필요하다.

 

권태는 일이 없어서 생기는 병이 아니다. 아주 바쁜 일 가운데, 아주 돈을 많이 버는 사업 중에, 아주 잘 되는 사회 사업 중에, 기독교 봉사 중에, 부흥하는 사역이나 선교 중에도 권태가 공격해온다.

 

많은 선의의 목사님들과 부모님들은 일을 더 열심히 하면 권태가 없어진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권태를 느낄 때 오히려 일을 줄이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성일을 의미 있게 보내므로 끊임 없이 들떠 있는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강하고 은밀한 양식을 제공 받을 필요가 있다.

 

묵상하는 습관을 기르고 묵상하는 삶을 살도록 한다.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노력한다. 사람들과 사건들과 환경들에 보다 더 전인적/총체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쓰므로 그들의 미적, 영적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찾아낸다. 이 것을 Michael Raposa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를 들어, 어떤 주어진 대상과 내가 할 수 있는 유익한 일들에 권태를 느낀다면, 갑자기 그 대상의 심미안적 우수성과 재능을 묵상하여 찾아낸다. 파티나 모임에서 대화에 권태를 느끼면, 갑자기 그들의 액센트와 목소리에 장난스럽게 매혹되어 본다. 어떤 대상을 특정한 목적을 위해 주의 깊게 관찰하는 일에 실증이 나며, 갑자기 나는 새로운 방법으로 그 대상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권태를 느끼면, 역시 갑자기 무언가 그 사람에게 새로운 것을 찾아내 그 사람과 다시 사랑에 빠진다. (p.87)  

 

권태는 사회적 전반에 걸친 문제이며 우리 사회는 여가와 entertainment를 하잖게 여겨 상품화하고, placebo(위약<僞藥>)을 제공할 뿐이다. 연속극, fashion, concert나 유행가 등으로 돋구는 행복은 잠시뿐이다.

 

우리들 모두 영적 전쟁을 하고, 선과 악을 분별하고, 기도를 하고, 축사를 하고, 중보를 하여야 한다. 악한 사회에서 받는 자극과 정보의 양을 줄이고 우리의 영성을 교화하고 품성을 높이며 지덕을 함양하는 여가를 즐기도록 노력해야 한다.

 

영생을 주시고 매일 축복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드리거나 감사를 드리지 않으며 생각이 허망(虛妄)하여 미련한 마음으로 어두워지는(롬1:21) 권태는 큰 죄악이 된다. 이런 악한 권태 중에 사는 자들과 이 악한 권태로 인하여 짓게 되는 여러 죄악을(롬 1:24, 26, 28) 범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신다.  

 

Kierke-gaard은, 인간의 이 곤경은 우리를 원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창조된 우리들의 참 모습을 잃어버리므로 시작하였다고 주장한다. Pascal은 자신의 겪었던 경험을 통하여, 권태에 대한 해답은 주님의 은혜를 묵상하고 믿음을 행함에 있다고 주장했다: “행복은 우리 안이나 밖에 있지 않다. 행복은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안과 밖에 있다”

 

권태는 결국 다른 방법으로는 치유가 없고 예수-중심의 삶으로 되돌아가 하나님을 향한 열정(passion)을 회복함으로 치유된다.

 

References and Resources

R. Baxter, The Practical Works of Richard Baxter, vol. 1 (Ligonier, Penn.: Soli Deo Gloria Publications, 1990); M. Csikszentmihalyi and R. E. Robinson, The Art of Seeing: An Interpretation of the Aesthetic Encounter (Malibu, Calif.: J. Paul Getty Museum and Getty Center for Education in the Arts, 1990); W. Dean, “Theology and Boredom,” Religion in Life 47 (Spring 1978) 109-18; H. Fairlie, The Seven Deadly Sins Today (Notre Dame, Ind.: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79); S. D. Healy, Boredom, Self and Culture (Cranbury, N.J.: Associate University Presses, 1984); O. E. Klapp, Overload and Boredom (Westport, Conn.: Greenwood, 1986); D. W. McCullough, “Anything but Boredom,” Christianity Today 35 (August 19, 1991) 30-32; N. Postman, Amusing Ourselves to Death: Public Discourse in the Age of Show Business (New York: Viking, 1985); M. L. Raposa, “Boredom and the Religious Imagination,”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53 (March 1985) 75-79.

 

A brief summery of R. Paul Stevens’ boredom —The Complete Book of Everyday Christianity.

 

출처 : Total-Healing
글쓴이 : BLES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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