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전략-혁신의 도구 디자인 경영
기업 전략-혁신의 도구 디자인 경영
기업 경영에서 디자인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미 ‘구문(舊聞)’이다. 대부분의 경영자들은 경쟁 격화와 기술 평준화, 소비자 욕구 변화 속에서 가격을 낮추고 품질을 높이는 전통적 비즈니스 방법만으론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어떻게 디자인 경영을 실천해야 할지 확실히 알지 못하는 기업이 많다. 동아비즈니스리뷰 11호(6월 15일자)는 디자인 경영과 디자인적 사고로 혁신을 이뤄낸 기업들의 사례에서 경쟁력 강화를 위한 시사점을 찾아봤다.
○ 고유의 디자인에 기업 정체성 담아야
레인콤은 한때 MP3 플레이어 세계 1위 업체였다가 애플에 밀려 고전했다. 2005년 이 회사의 양덕준(현 이사회 의장) 사장은 일본 도쿄 매장 개막행사에서 한 당돌한 고등학생에게 질타를 받았다. 이 학생은 양 사장에게 “당신들 제품(아이리버) 자체에 훌륭한 매력이 있는데 왜 자꾸 애플 아이팟(iPod)을 흉내 내려고 하느냐”고 버럭 화를 내며 따졌다.
양 사장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세계적 베스트셀러 아이팟을 의식하다 보니 어느새 ‘짝퉁’이나 다름없는 제품을 만들고 있었다. 점유율 경쟁에만 매몰돼 아이리버다운 것이 무엇인지 잊고 말았다”며 후회했다. 이후 양 사장은 다시 아이리버만의 특징을 살리기로 결정했다. 디자인 정체성을 회복하자 적자에 시달리던 레인콤은 지난해 흑자전환에 이어 올해에도 실적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레인콤 사례는 기업의 디자인 정체성이 왜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일관성 있는 제품 디자인은 소비자들에게 기업의 철학을 전달하며 고객 충성도를 높이는 역할도 한다.
○ 디자인에 맞춰 업무시스템까지 바꿔
디자인은 단순히 물건을 예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략과 혁신의 도구이기도 하다.
국내 금융계에서 디자인 경영의 우수사례로 꼽히는 현대카드는 세계적 디자인 컨설팅 회사인 IDEO와 협력해 회사의 장기 전략을 세우고 운영 시스템도 개선했다.
IDEO는 먼저 한국 소비자에 대한 관찰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일과 놀이’ ‘휴식(timeout) 필요’ 등 7가지 키워드가 도출됐다. 현대카드와 IDEO는 키워드를 기반으로 카드 이용자의 구체적인 사용 행태를 연구했고 최종적으로 20가지의 디자인 및 전략 가이드를 뽑아냈다.
현대카드가 1차적으로 실시한 실행전략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신용카드를 지갑에 꽂았을 때 회사 이름이 포켓 위로 올라와 돋보이도록 한 디자인. 이것은 여러 가지 신용카드를 지갑에 넣고 다니지만 습관적으로 한 가지 카드만 쓰는 한국인들의 사용 행태를 바꾸기 위한 것이었다.
획기적인 형식의 요금청구서도 고객의 니즈(needs)를 디자인에 적극 반영한 사례. 현대카드는 “청구서에서 가장 먼저 알고 싶은 것은 총사용금액인데 보통 총액은 세부내용 아래에 작은 글씨로 나와 찾기가 불편하다”란 소비자 의견을 눈여겨봤다. 이에 따라 총사용금액을 큰 글씨로 맨 위에 표시한 새 청구서를 만들어냈다.
현대카드는 이 과정에서 회사의 업무 시스템도 디자인에 맞춰 바꿨다. 디자인이 바뀐 새 청구서의 내용을 입력하기 위해 담당 직원들은 그동안 세로로 세워서 쓰던 회전형 모니터를 가로로 눕혀 사용하고, 관련 소프트웨어를 새로 프로그래밍 했다.
○ 외부 디자인 자원을 전략적으로 활용
내부 인력뿐만 아니라 외부의 자원을 활용해 성공적인 디자인 경영을 펼치는 기업도 많다. 외부 자원의 활용은 기업의 디자인이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막는 동시에 다양한 시각과 아이디어를 내부로 가져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탈리아의 생활용품 브랜드 알레시(Alessi)는 자체 디자이너 없이 외부 디자이너들과만 작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회사는 동시에 200여 명의 외부 디자이너와 협업을 하며, 디자인 대가를 초청해 일정 기간 ‘마스터(master)’가 되게 한다.
한때 파산 위기에 몰렸던 스포츠 브랜드 푸마는 1990년대 중반 질 샌더(독일), 쥘리 베(프랑스), 미하라 야스히로(일본) 등 외부 디자이너들과의 협업으로 자사의 스포츠용품을 ‘패션상품’으로 탈바꿈시켰다. 푸마는 이후 두 자릿수 성장을 거듭했고, 지난해에는 2억6900만 유로의 순이익을 냈다.
○ CEO의 뛰어난 안목-강력한 의지 증요
디자인 경영이 높은 성과를 올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뛰어난 디자인 안목과 강력한 의지를 가진 최고경영자(CEO)가 있어야 한다.
앨런 래플리 P&G 회장은 2000년 취임과 동시에 ‘디자인 경영’을 선포했다. 그는 과감한 구조조정에 들어갔지만 디자이너 수는 4배로 늘렸다. ‘디자인 사고’의 확산은 히트 제품의 양산으로 이어졌고 P&G는 성장 정체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중소기업이지만 세계 3대 디자인상 중 하나인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를 받은 루펜리의 이희자 사장은 디자인 경영으로 회사를 설립 5년 만에 음식물처리기 시장 점유율 90%의 ‘작은 거인’으로 만들었다. 대학원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자신이 직접 시장조사에 나서는 등 고정관념을 깨는 참신한 디자인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안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디자인에 대한 CEO의 의지가 확고해야 실무자들이 디자인 마인드를 가지게 된다”며 “CEO의 의지는 개발이나 마케팅 등 다른 부서의 ‘태클’로부터 디자인 아이디어를 보호해 창의적 혁신을 돕는 역할도 한다”고 말했다.
문권모 기자 mikemoon@donga.com
정임수 기자 imsoo@donga.com